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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회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전 - 무료 전시회 다녀오다.

by 고흐따라쟁이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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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관
전시기간 : 2022.8.12~2023.4.23

 

 


국립현대미술관에서 故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이중섭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총 90점의 작품으로 기증품 80점과 미술관에서 보유하던 10점을 합하여 무료로 입장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몇 년 전 이중섭 전시회는 입장권을 구매해 관람했었는데 이 번 전시는 무료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전시 초기에는 거의 100% 매진이었지만 최근엔 예약하기가 수월해지고 수/토요일은 오후 9시까지 관람이 가능해 직장인을 배려한 시간대도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전시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예약을 하고 싶은 사람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s://www.kguide.kr/mmca001/

이중섭 하면 근현대화가의 대표주자라고 중고등학교 때 배운 적이 있다.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없던 중고딩 시절이라 그냥 유명한 화가로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니 천부적인 재능에 비해 작품을 인정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다 무연고자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였다. 이 중섭을 세계적인 화가 고흐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들의 일생이 매우 유사하다. 유년 시절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림을 시작하고 어렵게 살다 생활고에 시달려 정신병을 얻게 되어 고흐 37살, 이중섭은 39살에 사망하게 된다. 특히 이중섭은 사후에도 위작 논란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 그 위작을 만든 이가 이중섭의 둘째 아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박수근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 민족 화가이며 이 번 이건희전으로 볼 기회가 생겨 이중섭에 대해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품에는 '소'와 '아이들"을 그렸으며 살아온 환경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하여 그 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특히나 역동적인 소는 단순한 붓터치로 황소의 강인함을 나타내 외골수적인 성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들.

이 전시에서는 소의 그림보단 주로 아이들과 주변 사물이 어우러진 작은 사이즈의 엽서 형태가 많았고 습작과 낙서처럼 보이는 작품, 그리고 담뱃갑에 그린 은지화가 상당히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시대적으로 작가의 일생을 정리한 연혁이 이중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배우 고두심님의 목소리로 도슨트 해주는 로봇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유복자로 친가와 외가 모두 부유했으며 특히 외가는 평양에서 손꼽히는 부농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산고등학교에 입학해 미술 선생인 임용련을 만나 서양화를 배우게 된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학을 나오고 유럽 유학을 한 당시 인재 중에 인재로 일제 치하에 있는 어지러운 나라에 도움 되고자 민족주의가 강한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초를 튼튼히 할 것을 요구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습작을 많이 그렸고 주변의 사물을 찾던 중 그의 평생 모티브가 된 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탁월한 실력으로 이중섭은 스승의 제안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하며 점 차 그 만의 특유의 화풍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학 재학 중 전시 및 미술 대회에 작품을 출품해 다수 입상한 경력이 있으며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 (이남덕)과 좋은 만남을 이어가다 고국인 원산에서 1945년 결혼하게 된다. 같은 해 해방했지만 공산화된 북한에서 부유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래도 꾸준한 작품활동 하며 "원산신미술협회"를 결성해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무일푼으로 모든 재산과 그림을 남겨놓고 남한으로 피난 가게 된다.
부산에서 겨우 터전을 잡았지만 주변에 연고가 없던 이중섭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서 아들 둘, 아내와 끌어안으며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갔다. 부산생활이 지칠 때쯤 제주도에 피난 간 조카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1951년) 거처를 옮긴다. 여전한 생활고에 좁디좁은 쪽방 생활은 힘겨웠음에도 추운 부산에 비해 따듯한 제주도에서의 삶은 자유롭고 여유롭게 해 주었다.

 

춤추는 가족  1950년대 전반. 춤추는 가족. 22x29.7cm

 


제주도에서 1년 반정도 살다 1952년 생활고로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갔다. 가난해도 가족과 함께 있어 행복했던 이중섭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장인의 부고로 이중섭만 고국에 남고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을 가게 된다. 이별한 가족과의 재회를 위해 그는 다방면으로 돈을 모으기 위해 정기 간행물의 표제와 삽화를 그렸다. 그러나 쉽게 가족을 만날 수 없었던 이중섭은 겨우 단기 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에서 가족과 짧은 만남을 가지고 다시 혈혈단신으로 부산에 돌아왔다.  언제 가는 가족과 같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림에 더 몰두해 전시회 및 대회에 많은 작품들을 출품했으며 1953년 공예가 유강렬의 추천으로 나전칠기기술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자유예술]과 [문화예술] 에 다수 삽화를 남김.

 

이 중섭의 작품 활동

  • 1954년 5월, 유강렬, 장윤성과 <3인전>(통영 호심다방)을, 강신석,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과 <6인 전>(마산 비원다방)을, 박생광과 <이중섭 개인전>(진주 카나리아다방)을 차례로 개최.
  • 1954년 6월, 한국 전쟁 4주년 기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경복궁미술관)에 '소', '닭', '달과 까마귀'를 출품.
  • 1954년 7월, <현대미술작가전>(천일백화점)에 출품.
  • 1954년 9월-11월, 책 <저격능선>, <황금충> 등의 표지화를 제작.
  • 1955년 1월, 개인전 <이중섭 작품전>(미도파백화점)을 개최.
  • 1955년 4월, <이중섭 작품전>(대구 미국공보원)을 개최.

 


일본에 있는 가족을 항상 그리워하며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묻고 엽서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려 보냈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막노동과 그림을 병행한 탓에 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져 정신도 점점 메말라 갔다. 그래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있었다. 미술 도구 살 돈이 없자 담배를 즐겨 피던 이중섭은 담뱃갑에 있던 은박지를 캔버스 대용으로 사용해 새와 닭, 물고기와 게, 아이들, 가족등을 그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다수의 은지화 작품을 남겼고 그중 은지화 3점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소장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은지화.


실낱같은 희망으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했었던 '미도파화랑'과 '대구 미공보관'의 전시회는 실패로 끝나버리고 이중섭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행동하며 그리워하던 가족에게 조차 편지를 끊어버렸다. 가지고 있던 작품들은 주변 지인과 가족에게 일부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영양실조와 거식증, 정신병 등으로 1956년 9월 39세의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이 중섭은 사후에도 끊임없는 위작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그가 그린 캐릭터를 짜집기해 새로운 작품인양 양산한 모작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며 그중 2800 여점이 위작으로 판명난 사례도 있다. 나라를 잃었을 때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독한 가난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위작으로 아직도 이중섭의 사후는 편할 날이 없으니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1955년 미도파 화랑전 - 이중섭 개인전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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