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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잡지식

을미사변, 나라 팔아먹은 고종 그리고 뇌물 (세번째, 마지막회)

by 고흐따라쟁이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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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들을 살펴보다 알게 된 고종의 실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민비는 본래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종이야 말로 이미지 세탁을 제대로 한 왕이다. 관련 내용으로 총 3편에 걸쳐 글을 게시하려고 했고 이 글이 최종 3번째이다.

첫번째는 전반적인 고종과 명성황후 대한 내용. 두번째는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대결구도와 명성황후의 실체.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고종의 무능력과 책임회피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으며 받았던 뇌물, 망국의 왕 모습이다.

을미사변에 흥선대원군이 있었다.

조선 19세기는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으로 시달렸고 그로 인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하게 된다.
개방, 개화 등에 무지하던 당시 그 조약이 불평등한 조약 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내부적으로 안동김씨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탁월했으나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그의 아들인 고종은 문호 개방을 했으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개방을 하니 결국 주변 나라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 와중 고종과 명성황후는 권력 다툼이 심해 서로 적이라 치부하고 맹렬하게 싸웠다. 정작 일본에게 주권이 상실되는데 말이다.

1895년 8월 일본 낭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를 당한 을미사변이 발생 한다.
그 교살을 주도한 주범이 100% 일본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인 내부자와 일본이 내통하여 같이 주도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 의견이 나온 배경은 국제적으로 조선이 여러 나라와 교류 중이었고 러시아와 친분을 쌓고 있어 일본이 함부로 조선의 왕비를 시해할 수는 없었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이런 설이 나온 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낭인에 의해 민비가 살해당하고 3시간이 지난 후 의외의 인물인 흥선대원군이 나타난다. 여기서 일본은 자신들의 범행을 대원군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대원군을 협박하여 민비의 얼굴을 몰랐던 일본군에게 알려주고 살해했다는설과 대원군과 일본이 민비를 교살하기 위해 대원군이 직접 미우라 공사에게 접근해 작전 모의했으며(작전명 암여우를 죽여라) 8월 20일 새벽 3시 일본 낭인들과 훈련된 병사들이 대원군을 호위하며 경복궁 난입한 후 왕비를 시해했다는 설이다.
이 외 더 여러 의견은 있으나 결론은 일본인에 의해 한나라의 왕비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 사회가 얼마나 체계가 없고 힘이 없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고종의 로맨스 (?)

을미사변 후 고종은 자신의 아내가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후속 조치보단 고종의 총애를 받아 민비에 의해 쫓겨났던 엄상궁을 다시 부른다. 그리고 고종은 자신 목숨이 위태로움을 느끼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1896년 아관파천을 도와준 알렌에게 운산금광을 채굴할 수있도록 채굴권을 헐값으로 미국에 넘긴다.
그리고 미국은 40년 동안 조선에 지불한 채굴권 비용의 1000배를 수익을 벌어 들인다. 고종도 고마움의 표현을 민비 못지않게 상당히 통 있게 잘 퍼 줬다. 부창부수가 맞나 보다.
노다지란 말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조선인이 채굴권이 넘어간지도 모르고 금채굴을 하니 미국인이 Don't touch 말했다. 그 말이 노다지 들려 지금의 노다지가 됐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을때 엄상궁은 아들 은을 낳아 고종의 후궁인 귀인으로 책봉된다.
1903년에 아들이 황태자(영친왕)로 책봉되자 황귀비로 책봉한다. 또한 정력이 넘친 고종은 한 궁녀에게 승은 줬고 1912년 고종 나이 59살에 덕혜옹주를 낳았다. 옹주를 나은 양 씨는 후궁 귀인으로 책봉이 되고 그녀의 한미한 집안은 출세를 하게 된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던 말던 옹주를 나은 기념으로 궁에서 큰 잔치를 벌였으며 딸을 위해 궁내 유치원도 개설해 준다.

 

고종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뇌물

러일 전쟁 승리 기념으로 일본은 고종에게 30만엔을 뇌물로 주고 경부선 철도의 지분을 보장해줬다.
1903년 3월 31일 영국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줬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 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
고종은 뇌물 받은 것이 고마웠는지 뇌물을 준 이토와 그 의 부하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또한 을사조약 직전 일본은 고종에게 2만원과 을사오적 무리에게도 골고루 보너스 줬다는 내용이 일본의 기밀문서에 언급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을사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대신들이 상소문을 보냈고 고종은 그 상소를 쓴 당사자에게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파면시켰다. 직위 파면당한 양반 중 민영환과 조병세는 나라가 망해간다 성토하며 자결한다.
고종의 태도에 상소문은 엄청나게 쏟아졌고 고종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를 궐 밖으로 쫓아냈다.
을사조약에 고종 대신 체결한 친일파 을사오적중 한 명인 박제순을 국무총리 서리로 승진시킨다.
게다가 조약 당일날 고종이 면이 서지 않는다고 하여 이완용 보고 알아서 하라는 설도 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라드 헤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다 일분의 빌미가 잡혀 퇴위당한다. 마치 고종이 나라를 위해 특사를 파견한 것 같지만 당시 대신들이 강화도 조약에 반발함에 정치적 쇼일 수도
있단 얘기도 있다.

1910년 경술국치인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게 모두 넘어갔다. 나라를 뺏겼지만 찾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되려 일본에 의해 고종은 호위 호식하며 사치를 했다. 조선인을 휘어 잡기 위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일본은 고종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그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다. 궁 밖에는 나라를 찾겠다고 백성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고종은 그 독립협회를 핍박했다.

고종은 내탕금이라고 하여 비자금을 홍콩, 상하이, 독일에 예치했는데 당시 국가예산의 1.5~2%였으며
이상일 것이란 의견도 있다. 결국 이 비자금은 일본에 의해 뺏겼다고 하는데 정확히 확인된 바가 없다. 향간에 이 비자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을 거란 얘기가 있는 데 이 또한 아직까지 밝혀지진 않았다.

미국 국회 기록에 남겨진 덕화은행 작성 고종의 예치금 증서 . 사진=미국 국회 기록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고종을 이용했다.
고종의 우유부단함을 알고 그를 일본의 꼭두각시로 허울뿐인 왕으로 대접했다.
그러나 그는 바보는 아니었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신의 사익을 잘 챙겼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권력욕을 보고 자랐고 그의 조력자와 싸우며 왕의 자리를 지켰다.
자리보존은 뇌물로 이어졌다. 고종은 민씨 척촉 일가로부터 돈을 받았고 일본에게도 돈을 받아 지켜왔다. 결국 일본을 끌여 들인것도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게 한 것도 고종과 민비였고 그 위로 흥선대원군이 있다. 나라보단 권력을 위해 일본과 한 번도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나라를 뺏긴 것이다.


세계 정세가 그래서 어쩔 수없이 뺏겼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과정이 결과를 보여준다. 과정이 저 모양이니 결과가 당연한 거다. 소수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고 다수는 식민지인으로 살아야 했다.
왕은 자기 안위만 생각했고 독립운동은 일반 백성이 자발적으로 했다.
그리고 이씨 왕조 500년여 역사는 부끄러운 왕 고종으로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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