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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잡지식

명성황후는 진정한 조선의 국모였을까? (두번째)

by 고흐따라쟁이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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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역사가 어렵네요.
실체 하는 이가 오래전에 가셨고 남아있는 증거자료들이 권력자 혹은 당사자로 인해 수정, 미화될 수도 있고 작성자의 이해하는 의도에 따라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래서 썰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해 저도 가장 일반적인 내용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같은 사건이지만 여러 가지 의견이 나눠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역사가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 취미로 작성하는 일반인이고 역사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 제 개인 취향대로 단순하게 포스팅하려 합니다. 이 번 포스팅은 명성황후에 관한 내용입니다.(지금만 존칭 할게요)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틀어진 된 배경

영조, 정조 이후 왕권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순조, 헌종, 철종 때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로 이어진다. 외척의 세도정치를걱정하던 대원군은 앞에 포스팅 한 내용처럼 당시 가장 만만했던 여흥 민씨 민자영을 며느리로 들인다.

처음 궁궐에 입궁했던 민비는 시아버지의 카리스마에 말 잘 드는 며느리였다. 그러나 민비의 시아버지가 권력욕이 심해 왕인 아들이 20살이 넘어서도 본인이 직접 정치질을 하니 아들 내외가 불만이 많았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사이가 더 악화된 유명한 설이 있는데 고종은 민비를 중전으로 들이기전 부터 9살 연상의 궁녀와 로맨스 중이었다. 그들 사이에 아들인 완화군이 있었다. 민비는 자기 소생이 아닌 고종의 후사가 있음에 시기 질투가 넘쳐났고 자기의 입지를 위해 후사를 간절히 원했지만 몇 년 동안 애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첫 임신됐지만 바로 유산을 하고 만다. 다행히 바로 두 번째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귀하디 귀한 아들이 항문이 없이 태어나 버렸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미국 의사이자 선교사이고 외교관인 알렌이 수술로 고칠 수 있다고 했지만 시아버지가 손자 몸에 칼을 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며 산삼으로 고치라 했다. 그러나 애기는 산삼을 먹고도  4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민씨는완화군을 세자로 올리긴 위한 대원군의 고의라고 생각하고 더더욱 시아버지를 적대시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다시 돌아와 민비는 시아버지의 반대세력인 최익현과 협작 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그만하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흥선대원군을 드디어 몰아낸다. 드디어 고종이 1873년 직접 정치를 시작했고 민비는 고종의 정책을 간섭하면서 민씨 척족이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다.

 

민비의 통 큰 용돈.

민비는 통이 컸다. 주변에 외국인이 많았으며 정이 많아 선물도 듬뿍듬뿍 줬다. 한 번은 갑신정변 때 양오빠인 민영익이 얼굴, 목, 팔에 칼침을 당한걸 미국인 의사 알렌이 치료해준다. 민비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10만 냥을 사례금으로 주고 알렌이 서양식 병원을 차리고 싶다 하니 광혜원를 지어주었다. 그냥 빈 땅에 병원을 지어주면 되는데  잘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을 철거하고 허물어 병원을 설립했다는 얘기도 있다.

민비는 미국인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연세전문학교 설립자, 현 연세대학교)의 와이프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결혼했을때는 축의금으로 100만냥 투척했다. 그 내용은 언더우드 부부가 조선을 돌아다니며 조선의 삶과 사건 등을 기록한 책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에 기록되어 있다.

그 소중한 날(언더우드와 결혼하는 날) 아침에 조랑말들의 방울소리가 우리 앞마당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그 앙증맞은 짐승들의 긴 행렬이 중전마마의 선물을 잔뜩 싣고 도착한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현금 백만 냥이 었다. 아라비안나이트속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에는 2,500냥에서 3,000냥이 1달러쯤 되었기 때문에, 그 돈은 너그러운 조선 왕비께서 손쉽게 주실만한, 또 선교사 한 사람이 쉽게 처리할만한 액수였다. 두 분 마마께서는 우리의 혼례에 나인 네댓 사람을 보내 주었다. 군대에서는 아주 계급이 높은 한규설 장군이 대표로 왔고, 내각에서는 왕비의 가까운 친척이며 두 분 마마께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민영환이 참석했다.”

당시 조선말 일 년 국가 예산이 480~500만 냥이라고 한다. 그럼 민비가 언더우드 결혼 축의금으로 국고의 1/5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이 1냥 혹은 10냥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금액 차이가 나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화폐개혁을 하면서 단위가 바뀌어 금액이 더 커진 것인 것일 수도 있다.  국가 예산이  500만냥이면 인구 대비 적게 적용된 것 같다.

또 다른 민비의 통 큰 쓰임새는  무당을 궁으로 불러 굿판 벌이고, 특정 무당에게는 한번 점칠 때마다 비단 1백 필과 돈 1만냥 줬다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정 논단을 하려면 굿을 해야 하나 보다.  게다가 2살 된 애기를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에 엄청난 돈을 주고 세자 책봉받는다. 금강산 일만일천봉에 봉우리마다 돈 1천 냥, 쌀 한섬, 베 한필 바치며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물 쓰듯이 돈을 쓰니 대원군이 10년 동안 모은 국가의 재산이 1년여 만에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펼쳤다. 국고가 없으니 관직 매관매직을 허용하는데,  예를 들어, 돈으로 관직을 산사람이 며칠 있다 돈을 더 투자한 사람에게 관직을 내주고 권고사직을 당하는 형식이다. 돈으로 관직을 사니 투자했던 돈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의 등골을 빼먹었다. 그 부정부패가 안동 김 씨 세도 때보다 더 심한 개판이었다고 한다.

 

 

민씨 만행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개화를 했으니 군대도 변화를 주자고 일본의 후원을 받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든다.
국고가 거덜 나고 있었지만 별기군에게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구식 군인에게는 13개월 동안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다. 궁궐에서 일하는 대신들도 5년 동안 급여를 받지 못했다. 군인의 원성이 심해지자 마지못해 한 달치 급여로 쌀로 지급했는데 무게를 늘리기 위해 불린 썩은 쌀과 모레를 썩어서 주니 군인이 화가 나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한 성난 군인들과 백성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13명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일본에서는 일대 대병력을 조선을 보내고 일본의 군사행동을 본 청나라가 4000명을 군인을 역시 조선으로 보낸다. 이는 최초 외국인 부대가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이는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다.


처음 작게 시작했으나 군란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민심의 힘을 빌린 대원군 등판으로 군란 크기가 커진 게 된 것이다. 정상적인 군대가 없던 민비는 도망치게 된다.  대원군은 며느리이긴 하나 적이나 다름없는  민비를 사망으로 처리하고 장례까지 치러 버린다. 이는 민비가 살아있어도 절대 궁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메시지와 같았다. 그러나 머리가 비상한 민비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고종에게 알리고 다시 궁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반성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민씨 일가를 위해 세금을 낭비하고 부정부패는 더 난무하게 된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 다 죽어가는 조선에 백성들의 삶은 간혹 하기만 했다. 청나라의 쌀 수탈과 권력자에 인한 강제노역 및 말도 안 되는 세금 징수로 녹두 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5년 동학농민운동이 봉기된다. 조선 관군은 동학군에 매번 패하자 왕실은 민영준 통해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토벌해달라 요청한다. (후에 민영준 친일파로 전향한 후 민영휘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 제일의 대부호가 되며 자신의 이름 딴 학교를 만든다. 그 학교가 휘문 학교이다.)

청나라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으로, 일본은 중국과의 텐진 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온다. 심지어 동학군 vs 조선군과 일본군의 연합으로 전쟁을 하게 되고 결국 동학군은 패배한다. 그리고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하며 후에 김홍집을 필두로 친일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을미사변.

청일전쟁 이후 친러 정책을 펼친 민비는 일본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일반 군인 몇 명과 일본 낭인에 인해 민비가 기거하는 옥호루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한 후 시체를 불태워 나무 밑에 매장하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복궁내 서양관에서 거주하던 여러 명의 외국인이 시해 사건을 목격했었고 국제여론에서도 일본을 비난했지만 일본은 조선인의 내부 행이라고 하며 내로남불로 어영부영 무마했다. 국고를 물 쓰듯이 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왕비의 최후가 허망하기만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드는 것이 있다.
이 모든 주최자가 모두 민비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래도 한나라의 왕이 있는데 그는 그냥 가만히 쳐다만 봤을까? 아무리 쇠퇴한 왕이지만 중전이 마음에 안 들면 내 칠 수 있는 힘이 있는 레벨 자체가비교가 될 수 없는데. 그래서 다음 포스팅은 고종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이다. 이 둘의 관계를 알면 과연 누가 더 최악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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