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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잡지식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에 머물렸던 일본인의 최후 - 순한맛

by 고흐따라쟁이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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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역사 스페셜로 돌아왔다.

역사는 깊이 알면 머리 아프고 살짝 알면 흥미롭고 새롭다.

블로그 처음 시작할 때 한참 역사에 관심이 있다가 너무 엮기고 설킨 내용이 어려워 지금은 체험하는 등산이나 간단한 잡지식을 위주로 포스팅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살고 있던 일본인은 어떻게 일본 본토로 갔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유튜브와 나무위키등 자료를 찾다가 약간씩 상이한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그 내용을 모아 모아 두 번에 걸쳐 포스팅해보려 한다.

 

 

전범국 일본.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중 하나인 일본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폭격하여 열받은 미국이 1942년 그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며 한때 잘 나가던 일본이 주춤하게 된다. 그 후 고전을 면치 않던 일본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이 투하한 핵폭탄을 두 방을 맞고 결국 8월 10일 항복 의사를 밝힌다.  

 

핵폭탄 두 번 맛보고 흰 깃발을 들게 된 일본은  패전국임을 공식 시인하기 전 미리 소식을 접한 일본의 총리이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미리 독립군 투사를 만나 자국민 보호를 해주는 조건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넘기는 협상을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그 일은 없는 것으로 돼버리고 미국 육군 소장 아널드 장군에게 조선 통치권을 이양하게 된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다. 어쨌든 2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경술국치부터 시작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광복전에 생긴 일.

이례적으로 일본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전쟁에서 패한 것을 공식시인한다. 그러나 내용을 워낙 배배 꼬아 대부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광복은  15일이지만 피부로 체감하기 시작한 건  16일부터였다.  애매한 공식발표이긴 했지만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조선인은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늘아래 제일 잘난 인종으로 자부하던 일본인은 180도 위치가 바뀌게 된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사진이  3.1운동사진이라는 내용도 있는데 정확한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1920년대 일본에서 '문화통치'라고 하여 조선, 대만, 만주 등 일본인을  230만 명을 보냈다. 일본 정부차원에서 적극 권장한 프로젝트로 주로 일본의 하위계층이나 백수, 양아치, 깡패 같은 무리들에게 공짜로 땅과 하인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하층민이던 일본인들이 노다지 같은 기회라 생각하여 대거 제3국으로 이동했다. 그런 일본인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했다. 조선에 거주한 히키아게샤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를 구분하여  빼앗은 남의 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전례 없는 상류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천년만년같은 핑크빛 삶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치욕적인 일제치하에 갑자기 찾아온 광복.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광복이지만 원수같이 쳐 죽일 일본인들을 그냥 놔둘 수없었다. 분노한 조선인은 일본인과 그들의 앞잡이였던 조선인을 폭행하기 시작했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만 총 913건이었다.  자질한 단순 폭행은  267건이지만  그것도 기록된 사건일 뿐 소소한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로 더 많은 폭행, 살해 사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그토록 강추하는 신사들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지고 집단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교직자들이 집단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실제로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하는데 같은 민족이면서 더 탄압한 그들에게 참 교육을 실현했다.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안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자국민을 생각하는척했지만 막상 현실과 부딪치니  자신 안위가 더 중요했다. 역시 조선의 팔아먹은 왕이나 일본의 총리나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하는 것은 둘 다 어디서 배워서 실천하나 보다.  부하를 시켜 부산에 정박한 배를 급하게 구한 아베는 본인의 가족들만 데리고 조선을 탈출하려 했다.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일본인은  약 70~80만 명이라고 아베는 책임져야할 일본인을 버리고 조선에서 약탈로 불린 재산을 가지고 줄행랑을 치려 했다. 그러나 과한 과적과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침몰을 막기 위해 약탈품을 절반을 버리고 다시 부산항으로  몰래 기어들어와 경성으로 갔다.  결국 일본인에게도 반감을 산 일화이기도 하다.

 

광복이후 광화문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광복은 했지만 완전체가 되지 못한 한반도. 

일본의 패배로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간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일원인 소련군이 한반도로 계속 남진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  미군이 남쪽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평양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1945년  8월  26일 군사 분계선으로 합의한 38선 봉쇄해 버려 한반도는 지금까지 분단국가가 돼버렸다.

 

 

미군정이 주둔하던 남한쪽 사정.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일본이 패전국이 됐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생각한 조선은 일본이라 여겼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8월 16일 자기네 말이면 깜박 죽던 노예 같은 조선인들이 살기를 띠며 일본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위험을 감지한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려가려 했지만 일본 본토도 전쟁의 패배와 핵폭탄으로 난장판이 도시를 수습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재외국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각자도생을 해야 할 일본인은 자신들의 재산과 은행에 예치된 돈을 인출하며 조선을 탈출하려 했지만 결단코 쉽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 이고 지고 보다리에 담아 가려했지만 어디 그냥 보낼 수 있나.  한반도에 갈취한 재산을 가져간 무리에 대한 조선인의 민심이 흉흉할 뿐 아니라 분노는 하늘을 찔렸다. 이러한 정황을 알게 된 미군정에서는 일본인이 본토로 갈 재산은  1000엔으로 제한하고 재산도 일부분만 허용했다. 그에 만족하지 못한 일본인은 돈에 눈이 멀어 밀수선을 이용하게 되고 해적을 만나 재상은 더 탕진하는 꼴이 돼버렸다.

 

미군이 재산 인출을 제한하기 전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도 강탈만 당하니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세간들을 헐값에 팔기  시작했다. 한시적으로 남대문시장에 조선인이 보기 힘들었던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을 넘쳐났다고 한다.

 

 

아비규환 같다고 생각했을 일본인들. 그러나 미군이 있던 남한은 순한 맛이었다. 소련군이 있는 북한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매운맛 개고생 이야기는 두 번째 포스팅에서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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