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역사 스페셜로 돌아왔다.
역사는 깊이 알면 머리 아프고 살짝 알면 흥미롭고 새롭다.
블로그 처음 시작할 때 설화 같은 역사이야기로 시작을 했지만 지금은 체험하는 등산이나 간단한 잡지식을 위주로 포스팅했다.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살고 있던 일본인은 어떻게 일본 본토로 갔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자료는 유튜브와 나무위키등 자료를 찾아봤으며 약간씩 상이한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그 자료를 모아 모아 포스팅해보려 한다.
1편 - 광복 이전
전범국 일본.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중 하나인 일본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폭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가뜩이나 수세에 몰리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계기로 심기일전하여 1942년 그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다. 생각지도 않던 반격을 받은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이 투하한 핵폭탄을 두 방을 맞고 결국 8월 10일 항복 의사를 밝힌다.
패전국임을 공식 시인하기 전 미리 소식을 접한 일본의 총리이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미리 독립군 투사를 만나 자국민 보호를 해주는 조건으로 조선의 통치권을 넘기는 협상을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그 일은 없는 것으로 돼버리고 미국 육군 소장 아널드 장군에게 조선 통치권을 이양하게 된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다. 어쨌든 2차 세계 대전을 끝으로 경술국치부터 시작된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광복 전에 생긴 일.
이례적으로 일본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전쟁에서 패한 것을 공식 시인한다. 그러나 내용을 워낙 배배 꼬아 대부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광복은 15일이지만 피부로 체감하기 시작한 건 16일부터였다. 애매한 공식발표이긴 했지만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 조선인은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늘아래 제일 잘난 인종으로 자부하던 일본인은 그들은 나락으로 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일본에서 '문화통치'라는 명목하에 조선, 대만, 만주 등 일본인을 230만 명을 보냈다. 일본 정부차원에서 적극 권장한 프로젝트로 주로 일본의 하위계층이나 백수, 양아치, 깡패 같은 무리들에게 공짜로 땅과 하인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하층민이던 일본인들이 노다지 같은 기회라 생각하여 대거 제3 국으로 이동했다. 그런 일본인들을 히키아게샤라고 했다. 조선에 거주한 히키아게샤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를 구분하여 빼앗은 남의 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전례 없는 상류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천년만년같은 핑크빛 같은 삶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된다.
치욕적인 일제치하에 갑자기 찾아온 광복.
조선인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광복이지만 원수같이 쳐 죽일 일본인들을 그냥 놔둘 수없었다. 분노한 조선인은 일본인과 그들의 앞잡이였던 조선인을 폭행하기 시작했고 살해하기까지 했다.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만 총 913건이었다. 자질한 단순 폭행은 267건이지만 그것도 기록된 사건일 뿐 소소한 사건까지 포함하면 실제로 더 많은 폭행, 살해 사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사들이 조선인에 의해 불태워지고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교직자들이 집단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실제로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피해를 많이 봤다고 하는데 같은 민족이면서 더 탄압한 그들에게 참 교육을 실현했다.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안 일본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자국민을 생각하는척했지만 막상 현실과 부딪치니 자신 안위가 더 중요했다. 역시 조선의 팔아먹은 왕이나 일본의 총리나 내가 먼저 살고 봐야 하는 것은 둘 다 어디서 배워서 실천하나 보다. 총독은 부하를 시켜 부산에 정박한 배를 급하게 구한 후 본인의 가족들만 데리고 조선을 탈출하려 했다. 약 70~80만 명을 책임져야 할 일본인을 버리고 조선에서 약탈한 재산을 가지고 줄행랑을 치려 했다. 그러나 과한 과적과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침몰을 막기 위해 약탈품을 절반을 버리고 다시 부산항으로 몰래 기어들어와 경성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광복은 했지만 완전체가 되지 못한 한반도.
일본의 패배로 연합군이 승리한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일원인 소련군이 한반도로 계속 남진하자 그것을 막기 위해 미군이 남쪽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평양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1945년 8월 26일 군사 분계선으로 합의한 38선 봉쇄해 버려 한반도는 지금까지 분단국가가 돼버렸다.
미군정이 주둔하던 남한쪽 사정.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일본이 패전국이 됐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생각한 조선은 일본이라 여겼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8월 16일 자기네 말이면 깜박 죽던 노예 같은 조선인들이 살기를 띠며 일본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위험을 감지한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려가려 했지만 본토는 전쟁의 패배와 핵폭탄으로 난장판이 되어 뒷 수습하는게 먼저였다. 결국 각자도생을 해야 할 일본인은 자신들의 재산과 은행에 예치된 돈을 인출하며 조선을 탈출하려 했지만 결단코 쉽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져가려 했지만 조선인의 민심이 흉흉할 뿐 아니라 분노는 하늘을 찔려 시도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정황을 알게 된 미군정에서는 일본인이 본토로 갈 경우 현금을 1000엔으로 제한하고 재산도 일부분만 허용했다. 당연히 그 처사에 만족하지 못한 일본인은 밀수선을 이용하게 되고 해적을 만나 재산은 더 탕진하는 꼴이 돼버렸다.
미군이 재산을 제한하기 전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지만 조선인에 의해 강탈만 당하기가 일쑤였다. 별수 없이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세간들을 헐값에 팔았는데 그 물건들은 조선인이 보기 힘들었던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을 남대문 시장에 넘쳐나 손쉽게 구할 수있다고 한다.
상류의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떨어진 일본인들. 그러나 지금까지는 순한 맛이었다. 정작 일본 본토와 북한에서 거주한 일본인의 매운맛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2편 - 광복 이 후
그들만의 리그 '원산부'
조선 살던 일본인 ‘히키아게샤'은 그들만의 거주지인 함경도에 위치한 원산부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철도,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경찰, 군대등 온갖 편의 시설을 갖추며 살았고 조선인은 원산리라고 하여 그 주변 변두리에 살았다. 조선은 함부로 원산부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조선인을 보기가 매우 드물었다.
그래도 남한은 순한 맛이었다.
남한에 주둔하던 미국은 일본인에게 억압은 있었으나 그래도 송환선을 준비하며 일본인을 본토로 보내려고 했었다. 혼란한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귀환파와 남겠다는 잔류파로 나뉘게 된다. 귀환파는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세간살이는 팔았고 남기로 한 잔류파는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찾긴 했지만 해보지 않던 잔류파는 힘든 노역과 조선인의 멸시에 힘겹게 일했다고 한다. 어느 중학교 일본인 여교사가 일본 패전 후 일자리에서 잘리고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식모로 되기도 하고 일본인만 이용한던 대중목욕탕을 정작 자신이 때밀이로 일하게 되었다는 역지사지 일화 등이 있다.
잔류파들이 조선에 남은 이유는 잔류파 대부분이 조선에 태어났고 본토인 일본에 터전이 없기도 했으며 여러 차례 대공습과 핵폭탄으로 폐허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 YMCA에서 일본인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개최했는데 희망자가 너무 많아 금세 마감이 되어 학급을 늘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의 뜻과는 반대로 그 해 9월 미군정에서는 일본인을 본토로 전원 송환을 진행하게 된다. 미국의 송환선 기준은 순차적으로 군인과 경찰, 민간인, 공무원 순으로 진행했다.

북한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매운맛.
그러나 북쪽에 있는 소군정의 내용은 달랐다. 미국과 달리 소련은 일본인은 바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의 물자 조달이 어려워 현지에서 알아서 조달하라는 명령하에 일본인 재산을 약탈하였다. 그뿐 아니라 소련군은 밤낫없이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했고 폭력이 난무했으며 지나가는 부녀자들을 강간하였다.
인민위원회를 조성한 조선인들은 일본경찰출신과 그들의 친척을 찾아서 잔인하게 처벌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생활고는 점점 더 어려지고 일부 여자는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이 내용이 일본본토까지 알려지며 충격을 안겨줬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에게 몸을 팔았던 여자는 ‘로스케 마담’이라고 불렸다.
소련도 전쟁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평양과 만주에서 거주하던 고급인력의 일본인들을 소련의 시설복원을 위해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 소식을 일본도 알고 있었지만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던 처지라 바로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그다음 해 1946년 그들은 본국으로 겨우 송환했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가도 매운맛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은 생각지도 못하던 무시와 멸시를 받게 된다. 타국에서 온 일본인을 ‘히키아게샤’라고 부르며 그들을 놀고먹고 온 외지인으로 치부했다. 히키아게샤들이 한꺼번에 본토에 몰려드니 가뜩이나 모자란 식량이 금세 거덜 나고 변변한 주거지가 없어서 수용소 생활을 했어야 했다.
그나마 친적이 있는 사람들은 얻혀 살긴 했지만 이 마저도 잦은 트러블이 있었다. 어려운 살림에 객식구가 늘어나니 그들이 기생충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 적응하지 못한 히키아게샤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속출했고 일본인의 혈통성까지 의심받았다. 학교에 가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결혼할라치면 전염병처럼 취급했다.
아니러니하게도 일본 본토인들은 히키아게샤들에게 '식민지에서 수탈하고 착취하며 살아 지금은 천벌을 받은 거'라고 손가락질을 했다고 한다. 본토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니 자긴들이 태어났거나 오랫동안 거주했던 조선이나 대만 등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물론 세월이 흘려 일본에서는 히키아게샤를 전쟁의 피해자라고 조치를 취해줬지만 이미 오시간이 흐른 뒤였다
광복 후 몇 달간 혹은 몇 년간의 히키아게샤의 어려웠던 삶을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정말 딱 사이다 같은 결말은 없어서 안타깝다. 그들보다 몇 배 더 힘들었을 우리들의 윗세대에게 세대차이 운운하지 말고 고마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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