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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회

허세 충만한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와 그의 작품들.

by 고흐따라쟁이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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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넘어가면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상파. 
그중에 후기인상파의 3개 대표작가라 하여 고흐, 고갱, 세잔이라고 귀에 딱지 않게 미술시간에 배웠었다. 그들은 살아생전 작품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 인정받으며 엄청난 값어치로 세인의 주목을 항상 받고 있다.  고흐는  천재성이 돋보이는 톡특한 터치와 색채로 많은 대중이 좋아하며 세잔은 그야말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칭하고 있다. 그런 반면 고갱의 대표 작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나마 생각나는 건 타히티로 건너가 원시적인 환경과 여성을 모델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는 정도이다.  이름은 잘 알고 있지만 고흐나 세잔에 비하면 고갱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이 참에 고흐의 라이벌이라고 칭하는 고갱에 대해 알아보았다.
 
고흐는 탈인상주의라고 한다. 인상주의는 실사를 보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에 따라 그림의 색채가 달라지는 것을 캐취하여 그림을 그린다고 해  빛의 화가라고도 칭한다. 대표적인 화법은 점묘법으로 점차 화가의 특성에 변형되어 발전하게 된다. 반면 고갱은 인상파의 화법과 색채와는 달리 강한 원색을 보색처리 하여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채색으로 작품을 강하게 인지 시켰다. 초기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아마추어 작가에 입문해 인상파 화풍을 따라 했으나 점차 자신만의 단색과 형태로 후에 야수파인 마티스와 입체파인 피카소에 영감을 주었다.
 
고갱 하면 타히티의 여인을 그린 모습들이 생각난다. 강렬한 원색으로 당시 유행하던 일본판화 영향을 받아 가뜩이나 강렬한 색상에 판화처럼 테두리를 그려 더 강렬하게 표현했다. 
 
폴 고갱  (1848-1903)은  페루출신 프랑스계 어머니 '알린'와  공화주의자 언론인 아버지 '콜로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851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집권하던 시절로 혁명이 한창이었다.  콜로비스가 자유주의를 신문에 기고한 탓에 정치적인 문제로 탄압받게 되고 견디기 힘들었던  콜로비스는 처가가 있는 페루로 망명하게 된다. 불행히도 그는 페루로 가는 도중 배에서 갑자기 심장바미로 사망하게 되고  알린이 두 자녀 두 명을 데리고  페루에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고갱은 잠시나마 유복했던 유년 시절을 보내고 다시 생계유지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여러가지 직업을 걸쳐 화가 되었다. 선원에서 증권맨으로 이직하며  27살에  취미로 미술을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와 친분을 쌓으며 작품을 사들였으며 그중 카미유 피사로에게 많은 조언을 받으며 아마추어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  어느 정도 터전은 잡은 고갱은  덴마크 출신의 여자와  1873년 결혼을 하게 되고  슬하에 5명의 자녀가 있었다. 
 
1882년 주식시장 붕괴로 고갱도 명예퇴직하게 됐다. 마침 카미유 피시로의 조언으로 본업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 들게 된다.  그로 인해 나름 중산층으로 살던  생활은 막을 내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188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중상층 생활을 하다 취미로 시작하던 화가활동을 전업으로 바뀌며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져 결별하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갱의 항상 갈망하던 원시적인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1886년 부터 고갱의 특유의 색채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원시적인 것을 선망했던 고갱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화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점차 구축하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갱은 고흐의 제안에 따라  아를의 노란집에서 9주 동안 같이 생활하지만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고갱은 원시적인 삶을 그리기 위해 타히티로 떠난다.
 
우리가 아는 고갱은 타히티로 가서 많은 대작들을 그렸다라는 내용만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고갱은 고약한 성격과 여러 여자와의 결혼과 동거를 병행하며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찌들어있는 허풍이 센 인물이라는 것은 그다지 잘 알지 못한다.
 
18~19세기는 유럽의 제국주의로 각 나라들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등  크고 작은 식민지를 만들어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했으며 심지어 어느 나라가 더 많이 식민지를 차지하는지 경쟁하듯이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했으며 유럽이 전 세계 패권 국가임을 약탈과 강탈로 증명했다.
 
남태평양 타히티는 프랑스 식민지로 이미 유럽의 영향을  한참 받고있었다. 원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주민을 기대했던 고갱은 유럽화 되어 있는 도시와 유럽인들의 옷을 입은 원주민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원시적인 그림을 갈망하던 고갱은  자신이 생각한 원시적인 타히티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거짓으로 타히티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작품활동으로 타히티에 간 목적도 있지만 고갱은 많은 어린여자들과의 추문도 대단했다. 13살의 어린 여인과의 사이에 아이 낳고 자유롭게 결혼과 동거를 병행하며 난잡한 생활로 성병에 걸렸다는 일설도 있다. 당시 유럽사람들에게는 타히티는 지상낙원 같은 관광지였다. 고갱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과 달리 생각보다 타히티 사람들의 피부색이 까맣지 않았으며 지금의 하와이 사람과 유사한 체형과 피부였다고 한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들이 값비싼 가격에 팔릴 것이라 생각하고 멋진 금색 액자까지 만들어 파리 전시회에 출품했지만 돌아온 비평은 지극히 자아도취가 심한 돌아이의 그림이라고 멸시와 혹평을 받았다. 심지어 전업작가로 추천한 카미유 피사로 마저 그의 그림을 맹비난했다고 한다.
 
 

1. 황색의 그리스가 있는 자화상.

1891년 작품, 황색그리스가 있는 자화상.

고갱이 타히티로 가기전  그린  '황색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은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의 성경의 한 구절처럼 고갱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의지를 나타내는 자화상이라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고갱의 자신이 예수와 동일시하며 신격화하는 그의 허세를  매우 잘 표현한 작품이라 평도 있다.
 
 

2.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The Birth of Christ(Child of God)>,

티히티 파페에테에로 돌아 온 이듬해 그린 것으로 그의 13살? 14살 어린 애인 자신의 아들을 낳은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는 설이 있다. 직접적으로 고갱이 자신의 애인과 아이라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시기적으로 어린 애인은 임신 중에 있었으며 허세가 많기로 유명하던 성격을 비추어 봤을 때 충분한 유추할 만한 내용이기도 했다.
 
 타히티 가정집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지만 침대에서 출산한 여인이 그리스도 탄생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아기와 산모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넣는 것을 보면 자신을 신격화하는 허풍도 대단해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896년 7월 파리 전시회에 출품했지만 보기 좋게 욕만 얻어먹었다.
 
 

3. 타 마테테(시장: 우리는 오늘 시장에 가지 않을 거야)

타 마테테(시장: 우리는 오늘 시장에 가지 않을 거야), 1892

타 마테테는 타히티 장터에서 성매매를 위해 호객행위를 하는 퇴폐적인 서구 문화를 꼬집는 작품이다. 뒤에 나온 남자들은 생선을 잡아다 시장에 팔기 위해 나오고 여자는 매춘을 위해 상품대의 진열처럼 앉아서 남자들에게 호객 행위하고 있다. 이 작품이 타히티가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평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고갱도 타이티의 젊은 여성 혹은 매춘부들과 여느 유럽인이 하듯이 타히티 생활을 충분히 즐겼는데 후대에서 언급한 이 평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작품의 정확한 의도는 작가만이 아는 것이다. 후대 그의 그림이 재평가 많아 긍정적인 면으로 포장할 수 있으나 고갱의 성품상 과연 파괴되어가는 타히티를 보며 걱정했는지는 매우 의문이다.
 
 

4.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의 대표적인 대작 중 하나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란 제목으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고갱의 건강이 악화되던 시기로 궁핍함에 지쳐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면 누워있는 어린아이가 과거, 그림중앙에 서서 과일을 따는 젊은이는 현재, 오른쪽 아래 귀를 막고  괴로워하는 노파는 미래를 나타냈다고 한다. 왼쪽 윗부분에는 타히티 섬에 전해 내려 오는 전설의 여신상이 있고 그 옆에는 고갱의 딸 알린이 있다. 그의 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며 여신의 힘을 빌려 되살라고 자 한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한다.
 
고갱이 친구인  몽프레이에게 보낸 편지 내용.
죽기 전에 내 마음에 품어 두었던 대작을 그려 보기로 했네.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 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1897년 작.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고갱의 사조는 후기인상파, 탈인상파 또는 상징주의라고도 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난해한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있는데 제목 또한 특이하게 <뭐! 질투하니?>, <왜 화가 났니?>, <어디 가니?>, <신비롭게 보이는>, <언제 결혼하세요?> 같은 제목으로 은유적으로 했다.
 
고갱이 생존했을 때는 그의 그림의 값어치를 인정받지 못한 고흐와 매우 유사한 케이스이다. 그의 말년은 궁핍한 삶과 병마속에서 자살도 시도하지만 결국 갑자기 심장마비로 타히티에서 생을 마감했다. 난잡한 삶과 난해한 성격이라도 그의 작품은 후대에 지대한 영양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의 색채와 그림체는 입체파, 야수파, 초현실주의까지 다양하게 영향을 줬으며 현대미술을 발전하게 해 준 위대한 작가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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